결혼을 할 것 같다

올해 안, 혹은 내년 초 결혼을 할 것 같다.
멋 없지만 전화로 청혼해서 대답을 받았다.
조금 부끄럽다고 했다.
언제 귀국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귀국하면 바로 결혼 준비로 들어갈 거다.
나는 기쁘다.

by 한걸음 | 2009/09/05 23:40 | .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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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걸음 | 2009/02/19 15:38

공포의 문화

[서울신문]●폭력·살인·테러… 현대사회는 ‘공포전시장’

조류독감, 광우병, 비브리오균, 사스…. 잊을 만하면 신문이나 방송을 타고 나타나 인간을 겁주는 공포의 대상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로 인해 실제로 죽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무리 세어보아도 열 손가락 안쪽이다. 오히려 닭과 돼지를 키우다가, 횟집을 운영하다가 ‘허구적 공포’의 광풍을 맞고 자살한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저녁때 TV 앞에 앉으면 끔찍한 일은 왜 그리 많이 일어나는가. 세상은 온갖 패륜과 잔혹한 살인, 청소년 폭력, 괴질 등 마치 ‘공포의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그렇다면 예전엔 없거나,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들이 요즘 와서 공포를 느낄 만큼 폭증한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꼼꼼히 보아도 이를 설명해 주는 근거 있는 통계나 연구사례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남캘리포니아대학의 사회학 교수 배리 글래스너가 지은 ‘공포의 문화’(연진희 옮김, 부광 펴냄)는 미국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누구나 느꼈을 법한 ‘허구적’ 공포를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갖는다. 책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거짓공포’투성이다. 미국인들이 알고 있는 미국은 풍요의 나라이면서 공포의 왕국이다. 걸핏하면 학교에서 총질을 해대는 10대들, 마약에 찌든 중독자들, 이들이 벌이는 각종 범죄와 테러 등등.

일부 과대포장… 일부 심각한 사안 되레 무시

그 러나 저자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공포의 뉴스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보았다. 그 결과, 대부분의 공포는 근거가 빈약하거나,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임을 발견했다. 그는 이같은 공포의 유형과 그 허구성을 조목조목 지적한다. 이를테면 1990년대 미국인의 3분의2는 당시 범죄율이 1980년대 후반의 2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1980년대 후반의 범죄율이 더 높았다. 암에 대한 공포도 마찬가지.40대 여자들은 자신이 유방암으로 죽을 가능성이 10분의1이라고 믿지만, 실제로 그런 일을 겪을 경우는 250분의1에 불과하다.

1998년 LA타임스는 도로상에서 운전자끼리 싸우는 ‘도로분노’를 살벌하게 묘사한 뒤, 총격으로까지 이어지는 그같은 싸움을 피해 수백만명의 운전자들이 차를 돌려 달아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문제의 미국 북서태평양 지대에서 ‘도로분노’로 죽은 사람은 1년에 1명꼴에 불과했다.

정치인·기업·미디어 ‘가짜공포’ 확산시켜 이득

문 제는 오히려 심각한 사안이 대개 무시되고 만다는 점이다. 암의 경우 두려움을 가지면 오히려 병원에 가길 꺼려 예방에 역효과가 나는 경향이 있으며, 온갖 범죄 뒤엔 총기 문제가 있으나,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반면 그 허구적 공포 때문에 낭비되는 비용은 막대하다. 범죄예방과 관리를 위한 형사재판제도를 운영하는 데 미국인은 매년 1000억달러 가까운 비용을 부담한다. 발생률이 희박한 위험 예방을 위해 국가 재산을 낭비하는 동안 수백만명의 어린이가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근거 없는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3대 세력, 즉 ‘공포행상’은 정치인과 기업, 그리고 미디어다. 정치인에게 공포는 곧 표다. 범죄와 마약에 대한 사회불안이 높을수록 강력한 조치를 공약하면 쉽게 표를 얻을 수 있으며, 소수민족과 유색인종에 대한 공포를 선동하면, 쉽게 편견어린 백인 중산층 표를 얻을 수 있다.

美, 허구적 공포 예방에 年 1000억달러 부담

비 행기에 대한 공포를 자아내 보험상품을 팔고, 범죄에 대한 공포를 확산시킴으로써 보안산업이 호황을 누린다. 새롭고 강력한 공포를 선전함으로써 판매부수와 시청률을 높이는 미디어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른바 ‘공포마케팅’의 주체들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시종일관 이렇게 강조한다.‘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기 싫다면 공포행상인이 지어내는 거짓위험을 정확히 식별하라. 그리고 거짓공포에 맞서 싸워라.’ 1만 5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공포 행상인’ 들이 써먹는 테크닉

공 포 행상인들이 써먹는 테크닉 중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기술들이 있다. 과학적 증거 대신 애처로운 일화 동원하기, 개별적인 사건을 시대적 추세로 부풀리기, 날 때부터 위험한 부류의 인간들 비난하기 등등. 책이 소개하는 이들의 대표적 테크닉 몇 가지를 소개한다.

권위적 전문가연하는 사이비 전문가 말 인용 터무니없는 공포일수록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문가와 그들의 조사연구 결과를 내세운다. 그러나 검증되지 않은 3류학자일 경우가 많고, 연구방법에 근본적 결함이 있다.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 동원 대중의 공감을 자아내고 내 주변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감을 심화시킨다. 수술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나운 목소리가 의사들의 과학적 연구결과마저 의심케 만드는 것처럼.

선별적 통계 인용 가능한 한 통계수치를 비틀어 극적 효과를 얻으려 한다. 주변에 마약복용하는 사람이 있다고 응답한 아이들의 수치를 직접 마약을 복용한 수치로 왜곡하는 것처럼.

퀴진아트 효과 ‘퀴진아트’(CUISINART)는 미국의 주방조리 기구 회사인데, 퀴진아트 효과란 사실과 허구를 마구 뒤섞어 뒤범벅을 만드는 보도를 가리킨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에볼라바이러스에 관한 NBC ‘데이트라인’을 보면, 구석구석에 영화 ‘아웃브레이크’의 극적인 장면과 전문가들의 심각한 예측을 교차편집하면서 당장이라도 가공할 전염병이 퍼질 것 같은 인상을 심었다.

미스디렉션 미스디렉션(misdirection)은 본래 마술사가 물건을 감추는 동안 관객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기술을 말한다. 공포 행상인들은 아이를 범죄자로, 미혼모로 내모는 열악한 환경엔 눈감고 ‘무서운 아이들’에 초점을 맞추며, 정리해고에서 오는 고용불안 문제는 가린 채 부차적인 직장폭력만을 강조하는 수법을 쓴다.

임창용기자 sd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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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도덕적 불안을 자극하고 그에 대한 상징적인 대용물을 제공하는 자가 막대한 부와 권력을 차지한다는 점은,미국인들이 그처럼 많은 공포를 품는 이유에 대한 짧은 답변이 될지도 모른다."

“먼저 정치인들은 사회불안을 강조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범죄와 마약에 대한 사회불안이 높을수록 그에 대한 강력한 조치를 공약하면 쉽게 표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언론도 공포를 마케팅의 하나로 이용한다. 과학적 증거 대신 자극적인 일화를 동원하고,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위험을 곧 닥칠 재난으로 묘사하는 등 공포를 적절히 이용하고 있다. 이익집단 역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포를 부추긴다. 범죄에 대한 공포는 민영 교도소에 엄청난 혜택을 줬고, 어린이 실종에 대한 공포가 늘어나자 온갖 기업이 여기에 뛰어들었다.”

'공포의 문화'(배리 글래스너 지음/연진희 옮김/부광/1만5천원)중에서.



by 한걸음 | 2008/05/02 18:54 | | 트랙백 | 덧글(0)

[곽병찬칼럼] 어떤 사랑에나 진실은 있다

[곽병찬칼럼] 어떤 사랑에나 진실은 있다


[한겨레 2007-09-16 17:59:54]

[한겨레] 그때 나는 천박했다. 설사 범죄자라도 반드시 보호받아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저 말초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그들의 인격과 내밀한 감정과 비밀을 모두 까발리고, 조롱했다. 국방사업을 팔아먹은 국방장관이었고, 뚜쟁이질을 한 게 현직 장관과 국회 국방위원장 그리고 장관과 국회의원을 역임한 자였으니 얼마나 신이 났던가.
연서, 그것은 타인과 나누는 가장 내밀한 소통수단이다. 거기엔 오로지 수신자에게만 드러내는 감정이 있고 고백이 있다. 사기꾼의 것이라도 일말의 진정성이 담긴다. 세상은 거기에 사회적 규범을 들이댈 이유도 권한도 없다. 그로 말미암아 배반감을 느끼고 상처를 받았을 가족이라면 모를까. 그가 전직 장관에 국회의원이었다고, 도대체 “사랑하는 00에게, 산타바버라 바닷가에서 아침을 함께 한 그 추억을 음미하며 …”로 시작하는 편지를 들춰내고 침을 뱉을 권리가 어디 있는가.
기왕에 훔쳐봤다면, 나는 그들의 고백 속에서 최소한의 진실을 느껴야 했다. “우리가 20대라고 했으면 어떨까 하고, 가정을 해보았소”(ㅈ씨) “안아보고 싶소”(ㄱ씨) 따위의 심사가 어찌 그들만의 것일까. 그건 내 안의 꼭꼭 숨겨진,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는 나의 욕망이 아니고 무엇이던가. 더 크게 그들을 조롱한 것은 나의 그런 감정이 드러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투박한 문장 속에서나마 문학적 향취마저 놓쳤다. 그건 사랑의 감정만이 빚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완벽한 심정적 일치를(가) 몇 번의 대화로써(만으로) 우리들은(사이에) 기적적인 해후처럼, 쌍무지개처럼 일어났던 것이오.”(ㅈ씨) “… 언젠가 너의 붉은 색 감도는 눈망울과 그 가장자리를 적셔 내리는 눈물을 보고, 너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다.”(ㄱ씨) 홀리긴 했지만, 그들의 믿음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
인생에서 사랑은 단 한 번 찾아오는 게 아니다.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을 했던 시몬 드 보부아르는 사르트르 이외에 두 사람과 더 사랑을 나눴다. 특히 1947년 사르트르와 함께 미국에 강연여행을 갔다가 만난 소설가 넬슨 앨그렌과는 20년 동안 304통의 연서를 보낸다. 한 편지에서 보부아르는 이렇게 고백했다. “저는 당신 없이 그처럼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는 게 너무나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사랑은 그렇게 찾아온다. 보부아르, 피카소, 파바로티 같은 사람만이 아니라, 남녀노소 갑남을녀 장삼이사 사기꾼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사랑에나 진실은 있는 법이다. 설사 사기와 협잡에 놀아난 것이라 해도 거기엔 나름의 진정성이 있고, 고백이 있고 염원이 있다.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연애 사건’을 두고 다시 세상이 난리다. 국방사업을 농락한 11년 전 사건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호들갑은 몇 곱절 심하다. 수사기관은 편지까지 샅샅이 뒤지고, 언론은 거기에 의혹을 덧붙여 괴물로 만들었다. 정치적 목적과 장사치의 계산이 작용한 탓이다. 상심이 가장 컸을 그의 부인을 위로한 대통령 부인에게까지 의혹을 덧씌우는 행위에선 정략과 계산의 극치를 본다. 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렇다고 개인의 인격과 삶까지 파괴해선 안 된다. 사적인 진실을 능멸해서도 안 된다. 공적 차원에서 변씨의 문제는 연사가 아니라, 직권남용이다.
위선과 거짓이 판을 치는 시대, ‘죽어도 좋다’는 눈먼 사랑이 보고싶다. 호스티스의 도움을 받아야 술을 마시고, 마사지 걸을 고르는데 지혜를 발휘하는 자들이, 근엄한 척 폼 잡는 꼴만 보고 살 수는 없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by 한걸음 | 2007/09/17 09:22 | | 트랙백 | 덧글(0)

슈테판 츠바이크, <폭력에 대항한 양심>

칼뱅의 광기에 맞선 카스텔리오

오마이뉴스 정병진 기자

이제 우리 사회도 '똘레랑스'(관용)의 중요성을 점차 깨달아 가는 중이다. 똘레랑스를 말할 때 그 핵심적인 요소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일 것이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민주주의 이념에 있어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에 속한다. 그러나 분단과 냉전의 광기가 서슬 퍼렇게 살아 지배하는 이 나라에서 그러한 가치들은 지금까지 제멋대로 무시되어 왔다.

자신의 사상을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간첩', '빨갱이', '용공좌경분자'가 되어 고문받고 투옥되어야 했던 숱한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의 이야기를 접하면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이토록 잔인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당장은 놀라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폭력에 맞서다 희생된 자들을 오래도록 기억해주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큰 병폐다. 그러니 파시즘의 망령은 거듭 되살아나 시대를 비웃으며 설쳐대곤 하는 것이다.

독일의 유명한 전기작가인 츠바이크는 히틀러의 독재가 확고해지고 세계 전쟁으로 치닫던 당시에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미친 운전사인 줄도 모르고 독재자 히틀러에 열광해 마지않던 동포들에게 찬물 한 사발을 끼얹으려 함이었을까. 어쨌든 이 책은 일반에 완전히 잊혀져 있던 16세기 최고의 인문주의자이자 양심적 지식인인 카스텔리오를 부활시켜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카스텔리오는 루터와 더불어 대표적인 종교개혁가로 손꼽히는 칼뱅의 최후의 적수였다. 그런데도 칼뱅이 위대한 종교개혁가로, 장로교의 아버지로, 사람들에게 한껏 추앙받는 동안, 카스텔리오는 참으로 긴 세월 동안 거의 잊혀진 존재나 다름이 없었다. 한데 칼뱅의 폭력과 종교적 광기에 온몸으로 저항한 이 외로운 전사가 뒤늦게나마 재조명되고 있다는 사실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감히 카스텔리오를 에밀 졸라, 볼테르, 로크, 흄 같은 사람들과 함부로 비교하려 들지 말라고. 예컨대 카스텔리오가 벌인 싸움은 칼라 사건에 대한 볼테르의 항변이나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졸라의 항변과는 한마디로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 두 사람이 카스텔리오가 살던 당시보다 훨씬 개명된 인문주의적 시대에 살았다는 사실은 놔두고라도, 그들이 타인의 운명을 위해 자신의 명성과 안락만을 걸고 싸웠을 때 카스텔리오는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것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단자에 관하여>와 같은 그의 저서를 통해서 드러난 바, "관용"에 대한 카스텔리오의 외침은 유럽에서 거의 선구적인 것에 속했다. 그럼에도 그는 마치 없었던 존재인양 부당히 취급되어 왔던 것이다.

칼뱅이 세르베토라는 박식하고 창의적인 신학자를 교리상의 이유를 들어 이단자로 몰아 화형시킨 사실은 이 책을 접하기 이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제네바시를 장악하고 성서정치(Bibliokratie)를 펴면서 많은 무리를 낳았다는 것도 대충은 알고 있던 바다.

그러나 칼뱅이 얼마나 잔인하고도 비열한 인물인지에 대한 진면목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제 보니, 그는 가톨릭과의 싸움을 빌미로 제네바시 전체를 오로지 자신의 의지만이 관철되는 파시즘적 광기로 채웠던 사람이었다.

그의 신정 통치 처음 5년 동안에 13명이 교수대에 매달리고, 10명이 목이 잘리고, 35명이 화형당하고, 76명이 추방당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감방마다 죄수로 가득차서 간수장이 시 당국에 단 한 명의 죄수도 더 받을 수 없다고 통보할 정도였을까. 이것만 봐도 종교개혁을 내세운 그의 공포정치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칼뱅은 광신적 주지주의자로 오로지 가르치려고만 했지 도저히 남에게 배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신과 조금이라도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기필코 제거해야 속이 시원했던 지독한 독선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칼뱅의 본모습을 알지 못했던 카스텔리오도 처음엔 멋모르고 그의 문하에 들어가 일했다. 그러나 칼뱅의 독재와 그의 측근들의 위선이 시 전체를 망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까놓고 문제제기 하다가 결국 제네바에서 쫓겨나고 만다. 쫓겨난 카스텔리오의 삶은 비참했다. 칼뱅보다 훨씬 위대한 학자가 칼뱅의 입김으로 일정한 직업도 얻지 못한 채 구걸을 해야할 정도가 되었고, 기껏해야 바젤의 오포린 출판사에서 교정을 보는 일로 입에 풀칠을 해야했다.

카스텔리오가 추방된 이유는 너무나 사소한 문제에 기인한다. 그가 성서를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번역하면서 일부 용어 사용에 있어 칼뱅의 생각과 차이가 있다는 것, 아가서를 방탕한 연애의 기록으로 보았다는 것 등이다. 칼뱅은 이러한 사소한 트집을 잡아, 카스텔리오를 제네바시의 목사로 임명하기를 거부했고 끝내는 시에서 몰아내기까지 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칼뱅이 자신과 견주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는 학자 카스텔리오를 질투했다는 의심을 할 만하다.

추방된 카스텔리오와 칼뱅과의 싸움이 절정에 달한 것은 세르베토가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했다고 칼뱅에 의해 이단자로 화형에 처해진 다음부터다. 정치적 반대자들에 의해 한참 수세에 몰려 있던 칼뱅은 세르베토를 본보기로 처형하면서 그 모든 반대자들을 잠재웠다. 중세 가톨릭이 행했던 무시무시한 종교재판과 하등의 다를 바 없는 개신교 최초의 종교적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세르베토는 처참히 죽어가면서도 "예수,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그는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죽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삼위일체 교리에 어긋난 주장(<삼위 일체론의 오류>)과 칼뱅의 <기독교 강요>를 비판한 책(<기독교의 재건>)을 썼다고 하여 공개적인 신학적 토론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비극적인 생을 마감해야 했다.

여기에 카스텔리오는 침묵을 깨고 <이단자에 관하여> <칼뱅의 글에 반대함>과 같은 글을 써서 이에 목숨을 걸고 맞서고자 하였다. 만일 이들 내용이 당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면 칼뱅은 자신의 국가권력으로 월권을 행사하여 살인죄를 저지른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 치명타를 입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만큼 빈틈없이 치밀한 내용으로 칼뱅의 잘못을 낱낱이 공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르베트 사건을 말하는 카스텔리오의 명쾌한 문장 한 대목을 읽어보자.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을 뜻할 뿐이다. 제네바 사람들이 세르베토를 죽였을 때, 그들은 교리를 지킨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희생시킨 것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불태워서 자기 신앙을 고백할 수는 없다. 단지 신앙을 위해 불에 타 죽음으로써 자기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214쪽>


카스텔리오의 이와 같은 빛나는 명구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 그의 글은 칼뱅에게 별로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칼뱅의 명령에 따라 미리 행해진 검열에 의해 카스텔리오의 글들이 인쇄조차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나중엔 카스텔리오가 이단자들과 어울렸다고 하여 화형에 처해질 뻔했던 일이 벌어진다. 그러나 다행히 카스텔리오는 쇠약해진 몸 때문에 격렬한 위경련을 일으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런 불행한 사태만은 모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단순히 종교적 폭력과 광기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어떤 단일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되고 조작, 지배되는 사회가 얼마나 끔직한 파시즘을 낳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 본유의 양심과 자유는 철저히 유린당하고 만다. 그래서 저자는 결말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인류는 언제나 진보를 위해서 싸워야 하며, 극히 당연한 것도 새로이 의심받는다. 우리가 자유를 습관으로 여기고 더 이상 신성한 소유물로 여기지 않는 순간에 충동세계의 어둠 속에서 신비한 의지가 자라 나와 그것을 유린하려고 드는 것이다. 인류는 너무 오래 너무 근심 없이 자유를 누리고 나면, 언제나 힘의 도취에 대한 위험한 호기심, 전쟁에 대한 범죄적인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다."<271쪽>

by 한걸음 | 2006/06/29 03:24 |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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